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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보성)]경양방죽이 매립된후 20년이 지나 전두환의 난이 발생하였다

경양방죽이 매립된후 20년이 지나 전두환의 난이 발생하였다.
군부독재를 반대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학살되면서 광주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물의 도시로 칭송받던 광주의 랜드마크 경양방죽이 사라진 이야기 
 
온갖 잡목 우거저 관로를 뒤덮고
역루 가까이에는 꽃다운 연못 하나 있네
얼굴 비치도록 맑은 방죽물은 아득히 깊고
저녁 구름은 두둥실 그 위를 떠가네.‥ 
 
화순 군수이던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광주 경양방죽을 지나면서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이다.조선 세종  1440년 불심깊은 광주 부사  김방에 의해 조성된 경양방죽은 연인원 53만명이 동원되어 이룬 대역사였다.그 당시 전라도의 인구가 40만명이었다면 그 공사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면적 46.000평 수심 10미터의 대규모 인공호수가 수리.토목 전문가인  김방부사에 의해 만들어  졌던 것이다.호수 주변으로는 수백년된 팽나무.느티나무.버드나무가 수십리를 늘어져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전주에는 덕진호.춘천에는 소양호.경주에는 보문호.대구에는 수성못이 있어 도시의 허파역할을  하고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광주읍성을 두른 해자와 광주천.동계천.서방천의 물길이 이어져 주변 농경지를 비옥하게 했고 광주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한것이다. 물의 도시 광주가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누구나 예향 광주의 미학을 바로 느끼고 감동 할수 있었을 것이다. 
 
호남의 진산 무등산은 멀리서 보면 장방형의 무덤처럼 보이는 후덕한 산이다.그러나 정상 가까이 오르면 서석대와 입석대의 주상절리 기암괴석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불꽃이 솟아 오르는 형국이다.무등산의 화기를 조화롭게 해주는 것이 경양방죽 이었다고 한다. 
 
무등산 원효사  화암봉과 그 밑으로 장원봉이 뻗어 나간 산줄기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로 솟구치는 화룡승천형의 풍수라고 한다.여의주에 해당하는 둥근산이 태봉산이다.무등산이 품고 있는 둥근알이  태봉산인 것이다. 
 
광주의 명소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경양방죽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500년  동안 광주의 명소이며 젖줄역할을 했던 경양방죽도 일제 식민지배를 격으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일제는 일본 건국 1600년을 기념하고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주택단지를 조성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양방죽 매립계획을 세웠다.그러나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매립반대 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한 지방의 역사적인 유산을 말살하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이다.풍치지구로 미화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진정서가 일부 받아 들여져 설계변경을 통해 16.000평.을 남겨 두고 3분2는 1937년 매립되고 말았다. 
 
경양방죽의 수난은 해방후 60년대 박정희 혁명정권이 들어서고 다시 발생하였다.시가지가 커지고 호수주변에 오폐수가 밀려 들면서 정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매립계획을 세운 것이다.매립할 토사가 부족하자 광주역 자리에 있던 태봉산이 희생되었다.태봉산은 인조의 아들 용성군의 태를 묻어 태봉산으로 불린곳이다. 
 
예향 광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던 경양방죽과 태봉산은 도시 개발정책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  매립을 지역유지들과 유림.풍수가들은 적극 반대하였다. 무등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조성한 경양방죽을 매립하고 무등산이 품고 있는 여의주를 없애 버린다면 광주는 20년 후에 피바다를 이루게 될것이라고 혀를 찻다. 
 
그로 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나서 전두환의  난이 일어났다.군부독재를  반대하던  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로 피바다를 이루게 되었다. 
 
사진 1.2.3.4번은 훼손되기 전의 경양방죽 모습이다. 
 
사진 5번은 계림동 홈플러스  중심으로한 둥근원이 경양방죽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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